전시 구성
1. Video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 I_섬에서>, 싱글채널비디오, 4K, 4분 24초, 2024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 II_섬으로>, 싱글채널비디오, 4K, 9분 10초, 2024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 III_채집하는 자>, 싱글채널비디오, 4K, 2분 1초, 2023-2024
2. 설치
<Reclining Figure>, 4.2m x 1m x 1m, 석고, 지점토에 채색, 2024
<Reclining_177_24>, 3D print, 파이프, 70cm x 70cm x 50cm, 2024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展에서 전시, 홍티아트센터, 부산, 2024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展, 홍티아트센터, 전시 전경 I


미끄러지며 기대는

내가 너와 다른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만 나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옅어지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너를 볼 수 있었다. 
너를 발견하는 순간은 무력한 나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의 프레임 사이에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 I_섬에서, 4K, 4분 24초, 2024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展, 홍티아트센터, 전시 전경 II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展, 홍티아트센터, 전시 전경 III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 I_섬에서, 4K, 4분 24초, 2024  
Reclining_frame177_24, 3D print, 파이프, 70cm x 70xm x 50cm, 2024

Reclining Figure, 4.2m x 1m x 1m, 석고, 지점토에 채색, 2024

Loop, 4K, 5분 29초, 2024

물렁이고 부서지는 틈에 기대어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김소슬)
김시흔 작가를 만나기 전에는 작가의 입에서 언어학자이자 철학자 에두아르 글리상(Edouard Glissant)의 관계 시학을 들을 줄은 예상도 못했다. 김시흔은 ‘관계는 서로가 오염되는 것(물드는 것)’이라는 문장을 내뱉었다. 글리상의 정체성 담론은 관계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닌 다양한 문화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어 끊임없이 유동적이고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시흔이 그간 만들어 온 울렁거리는 형상들은 변하는 어떤 중간적 상태, 그래서 불확정적인 상태에 관심을 가진다는 뜻일 테다. 작품에 등장하는 형체들은, 어떤 때는 두툼한 혀를 뽑아 둔 듯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생명체의 내장 같기도 하다. 그러나 끈적한 점액질이 흘러나오거나 물컹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느낌보다는 매끈하고 단단한 질감과 다소 건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와 스튜디오에서 만나기 전, 그간의 작업 이미지를 메일로 묶어 전달받았다. 텍스트 없이 바라본 작품 포트폴리오에 대한 인상은 유기체화 되기 이전의 신체, 아메바와 같은 상태 같아서 ‘기관 없는 신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나 작가는 기능하거나 혹은 기능하지 못하는 신체에 대한 관심 또는 파편이 조립되는 접합과 접속에 대한 유의미를 찾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변하는 형태, 가령 물이 얼음에서 액체화되는 어떤 순간과 명명하기 어려운 관계성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 무명의 상태를 렌즈 삼아 타자를, 그리고 세계의 얽힘을 이해하려 하는 점이 주요해 보인다.
이번 개인전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에는 4개의 영상 설치와 2개의 조형  작품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여섯 작품은 여섯 가지 수집된 기억들이라는 이름하에 1. 이동하는 땅_섬에서 섬으로 2, Rust 3. 버려진 것들 4. 채집하는 자 5. 돌의 시간 6. 미끄러지며 기대는 몸으로 연결되어있다.
홍티아트센터 전시실 중앙에는 어둠 가운데 핀 조명을 받으며 <Reclining Figure>가 놓아져 있다. 격정적인 감정을 자아내기보다는 힘이 상실된 형태의 근육들이 다발처럼 서로 기대거나 흘러내리는 듯하다. 전시장 구석 모서리 에 설치된 붉은 색 파이프 라인 위 선홍빛 오일 스틱으로 채색된 점토 덩어리들이 걸쳐 있다. 김시흔의 이전 전시에서는 이 덩어리들이 투명성과 불투명성을 오가며 좌대 위에 꼿꼿이 서 있거나 혹은 공간에 부유하는 듯 설치되기도 했다.
전시장의 4개의 벽면에는 각기 다른 비율의 영상이 나오고 있다. 배경이 되는 가상 환경 속에 떠다니는 덩어리들은 초기작에서 보이던 불투명한 상태에서 어떤 투과성을 지닌 형체로 바뀌어 왔다. 영상작업은 손으로 문질러 제작한 점토를 3D 스캔으로 뜨고 이후 이미지 테이터로 추출하고 블랜더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마치 흘러내리는 액화된 형태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형체는 시간 속에 녹아내리는 중간의 어느 상태를 좌표한다. 김시흔은 인간, 비인간을 넘어서 자각하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되는 틈을 타자화라 말한다. 스스로 타자화되는 과정은 자신이 희미해지고 무너지는 것 같아서 다른 겹이 비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김시흔은 실제 환경이 ‘특정한 상황과 공간에 놓인다면?’과 같은 가설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해왔다. 지난 2021년 예술지구 P의 전시《불확정성의 형태》에서는 ‘화이트 큐브 안이 뜨거운 증기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유동할까’라던지, 지금은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과거 집창촌 대구의 한 지역을 부유한다면 무엇을 투과해낼 수 있을지 와 같은 가설을 세웠다. 이번 전시에서도 낙동강 하구라는 현실 장소를 가상 공간으로 접합하고 버려진 인형과 석상이 바닷가에 누워있는 합성된 공간이자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로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Ⅰ_섬에서>를 만든다. 실제 장소가 인트로 영상으로 구현되지만 다시금 현실-탈피 형태를 포괄하는 가상 환경으로 재설정되어 그 사이 시간과 공간의 틈이 벌어진다.
작가는 낙동강의 끝자락인 삼각주, 을숙도, 도요등, 백합등이라는 퇴적된 땅인 하구/사구와 홍티 포구가 자리한 무지개 공단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로 사이언스 픽션을 만든다. 작품 속 전환되는 장면은 논리적인 개연성을 설명히 하기보다는 마치 ‘끝말잇기’ 놀이처럼 유사성으로 결을 잇거나 걸쳐 놓는다.
<그, 그들로 존재하는 시간 Ⅲ_채집하는 자>는 나사(NASA)의 오픈 소스인 ‘화성에서 돌을 깨는 탐사 로봇 퍼서비어런스 로버’를 통해 낙동강 삼각주를 이어본다. 화성에서 채취한 돌을 지구로 가져와 분석해보면 예제로 분화구가 삼각주였으며 이는 화성에도 유기물 생명체가 있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화성에서의 돌은 낙동강 삼각주와 연결되어 시간적, 공간적 유대를 잇는 매개물이 된다. 삼각주의 사구란 다른 수역으로 흘러들어 연결되는 지점으로 그 곳에 암석이나 모래가 퇴적해 형성된 쌓여진 시간 그 자체를 지표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물렁이는 메타포가 어느새 단단한 돌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돌은 깍인다, 가루가 된다, 소멸한다. 그 형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지질학적  변화라는 과정 안의 비선형적 시간성이 더 주요해 보인다. 돌은 시간성을 메타포 한다. 돌은 미지의 시간성에 접촉할 수 있는 매개물이다. 오랜 시간을 지닌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를 이어준다. 돌이 지닌 단단한 속성은 역으로 흐르는 시간으로 은유하고 변전한다. 그간 작품 속 지속적으로 등장했던 액화된 이미지들은 가시적이거나 물질적인 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액화되고 흘러내리며 부서지는 시간성. 인지하지 못하는 배제된 공백의 시공간과 그 관계를 응축하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웜홀처럼 시공간에는 촘촘하지만 틈이 있어 그 간격 사이가 늘어나고 줄어들며 생성과 소멸을 초월하는 막처럼 말이다. 그렇게 김시흔은 어떤 물성을 통해 한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과학적, 지질학적 상상의 교차 서사를 시도 한다.
산화되는 시간은 돌을 비롯해 물이 흐르고 들어오고 나가는 배관 파이프 라인을 통해서, 그리고 붉은 색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이번 레지던시 기간 동안 머문 홍티 마을은 ‘붉을 홍’이라는 한자에서 붉은 색 자체를 지시한다. 김시흔은 다시 끝말잇기를 시작하며 붉은 색을 붙잡아 시간성에 연결한다. 노후화된 홍티 공단과 홍티아트센터의 외벽에는 여기저기 산화되어 붉은 녹이 슬어있다. 물질과 비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도 시간에 따라 산화된다. 붉은색은 산화되는 시간의 축적이다. 심지어 영상 속 등장하는 메타 휴먼조차 머리색이 붉다.
김시흔은 미국 유학 당시, 코로나19로 인해 보이지 않는 균과 그로 인해 공동 공간에 대한 두려움과 고립감 너머 한 개인의 취약성을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안전장치가 해제된 이 시기에 취약성을 온전히 감각하며 레비나스가 말한 자신을 버리고 타자의 세계를 영접하라는 명령이 무엇인지 숙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불가능하지만 나 중심을 벗어나 자신이라는 틀을 뭉개어 보는 것. 김시흔이 말하는 타자화란, 나와 몸을 소거해 주위 환경에 따라 흐르는 것, 어쩌면 유체 이탈해 자신을 밖에서 바라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몸이 더 이상 어떠한 형체가 아니라 미끄러져 내려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김시흔이 왜 에두아르 글리상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모래톱의 생성과 소멸도 온전히 ‘자연적’이지만은 않은 어떤 시스템에 의해 기대어지는, 그야말로 일반적인 예상을 벗어나 어색한 얽힘의 관계 자체를 발견하는 것. 그래서 작가가 말하는 ‘타자화’는 차라리 <어린 왕자>에서의 보아뱀이 삼킨 코끼리를 그저 모자로 봐버리고 말지 혹은 지레짐작하지 않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 들의 관계를 손으로 더듬어 볼 용기의 시간 정도로 부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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